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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잘 못하는 사람이 토론에서 자신이 패배하고 있음을 인지할 때, 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몇 가지 기술(?)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붉은 청어(Red Herring) 란 방법인데, 이는 주제와 상관 없는 하지만 많은 청중들이 궁금해 할 만한 논점을 만들어서 상대방이 토론 주제에서 벗어난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 입니다. 또 한가지 방법은 ‘허수아비 치기’라는 방법인데 상대방이 주장하지 않는 것을 주장한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혼동시켜서 관념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더 옳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입니다.
나치의 선전 장관이었던 괴벨스는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99개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을 섞으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 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창조론 연대기 18화에서 작가님은 온유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이는 창조론자들이 젊은 지구론이 사실일 수 밖에 없다는 강력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죽음과 사망의 기원에 대한 것 입니다. 그리고 작가님은 여기에 창조론자들이 하지 않는 주장들을 슬그머니 섞어 스토리를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토론에 있어 전형적인 ‘허수아비 치기의 오류’의 좋은 예입니다.
작가님은 어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에 대한 공격을 하기 시작할까요?
성경은 식물들에게 생명(네페쉬 (נֶפֶש) )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첨부된 장면을 보시면, 온유는 죽음이란 것이 아담의 죄로 들어왔으며, 지구가 수십억년 이 되었다면 아담 이전의 세월동안 동물 식물들의 죽음이 있었단 얘기가 된다고 주장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식물들에게 죽음이 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초식 동물이 과일을 먹는 것이 과일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제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죽은 건가요?
그렇다면 “도라지나 인삼같이 식물 전체를 다 먹는 것은요? “라는 질문에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성경은 식물과 동물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성경 어디에도 나무와 초목을 생물 혹은 살아 있는 영혼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식물도 생물학적 유기체이다… 그러나 식물은 지각 있는 생명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초목과 나무는 성경에서 사용된 표현으로 생물이나 살아 있는 영혼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1
여기서 살아 있는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페쉬 (נֶפֶש) 입니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혼(soul)과 가장 가까우며, 주로 인간을 지칭할 때 사용되지만, 일부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었고, 일부는 동물들에게 적용되었지만 식물들에게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또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식물이 죽는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창조론 연대기의 작가는 성경책에 기술된 내용을 과학책에 비교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을 뿐입니다.
식물에게는 생명이 없으므로 죽음도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8>
그러나 그녀가 격노 중에 뽑혀 땅에 내던져지매 동풍이 그녀의 열매를 말리고 그녀의 강한 막대기들은 부러지며 말라 불에 소멸되었으며 <에스겔 19:12>
해가 돋아 뜨거운 열기로 풀을 말리면 그것의 꽃이 떨어져 그것의 외형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야고보서 1:11>
다만 식물들을 사람이나 예수님의 희생에 비교할 때만 비유적으로 그런 단어가 사용될 뿐입니다. 우리가 건전지나 강을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건전지가 다 닳은 상태나 강이 심하게 오염된 상태를 건전지가 죽었다, 강이 죽어 간다라고 표현하듯 말이죠.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그러므로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동물의 죽음에 창조론자들이 주장하지 않는 식물의 죽음을 섞는 것은 ‘허수아비 치기’ 오류를 저지른 것 입니다. 19화에서 식물의 죽음을 포함시킨 온유의 실수(아니, 작가의 왜곡)는 계속해서 온유의 발목을 잡게됩니다. 물론 이는 고등학생들 수준의 토론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제대로된 실제 토론에서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전개되겠죠.
네, 로마서 5장 12절은 사람의 죽음에 대한 구절이 맞습니다. 그러나..
창조론 연대기 19화에서는 동물의 죽음에 대하여 또 다른 방법의 ‘허수아비 치기의 오류’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동식물의 사망이 없어야 한다는 온유의 주장에 맞서서 친구들은 로마서 5장 12절을 제시하며 성경에서 얘기하는 죽음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해석 합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얘기하는 사망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또 성경 전체에도 동물이 영생을 해야 했다거나, 죄로 인해 사망이 동물에게 들어왔다고 설명하는 직접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리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수많은 성경의 해석들은 부정당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유신 진화론자들은 젊은 지구론의 발목을 잡은 논리를 통해서 기독교 전체의 교리를 발목잡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삼위 일체 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예수님와 성령이 하나이지만 세 위격을 가진 분이라는 구절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믿지 않는 자들이 삼위 일체에 대해서 공격하는 주요 논리입니다. 성경에 삼위 일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또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직접적인 구절들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성품과 표현들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을 표현한 구절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해서 우리는 삼위일체가 성경이 나타내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또 민수기 25장에는 이스라엘이 모압과 음행하는 것이 발람의 계략이라는 표현도 없습니다. 오히려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며, 발람이 자기길을 떠났다고 기록해 놨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불의의 삯을 받은 대표적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뒤에 나온 불의의 삯에 대한 구절을 통해서 후대에 성경을 쓴 저자들 역시 모압의 계략이 발람에게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성경을 기록하죠.
이외에도 변화산 사건, 예수님에 대한 수 많은 예표들은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간접적 기록과 추론 그리고 해석에 의해 이해되는 것이지, 이를 정확하게 기록한 구절이 있어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시 동물들에게 사망이 없었어야 하는 성경적 근거
그렇다면 어떠한 근거로 사망이란 것이 동물들에게 적용되어서 안된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첫번째로 ‘사망 혹은 죽음’이란 단어는 동물들에게도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위에서 얘기한 네페쉬라는 단어는 네페쉬 하야라는 단어의 줄임말 입니다. 네페쉬가 ‘혼’이란 의미라면 하야는 ‘생명’ 혹은 ‘살아 있다’라는 뜻 입니다. 이 단어가 동물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생명에 반대되는 죽음도 동물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지속적으로 동물에게 죽음/사망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너희는 암소든 암양이든 그것과 그것의 새끼를 하루에 다 잡지 말지니라. <레위기 22:28>
레위기에서 사용된 잡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 티샤투의 원어인 샤챳(שָׁחַט)은 죽이다, 도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진멸하고 남기지 말며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기와 젖먹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매 <사무엘상 15:3>
사무엘상에서 죽이라!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타의 어원 역시 무트(מוּת)로 ‘죽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람과 동물에게 동시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람과 동물들에게 동시에 적용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망은 인간의 죽음으로 들어왔으며, 사망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마지막 원수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 그분께서 반드시 통치해야 하나니,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25~26>
두번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시에 육식 동물이 없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속에 생명이 있어 땅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채소를 먹을 것으로 주었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30>
이 구절은 단순히 당시에 모든 동물이 채식을 했다는 것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모습 속에는 생명이 있는 동물들이 서로를 죽이거나 잡아 먹지 않고 채식을 하는 것이 포함되며, 하나님의 창조 시에는 동물에게 죽음이 없었다는 것까지 함축적으로 의미합니다.
17세기 성경 전체를 주해한 신학자 John Gill은 창세기 1:29~30을 이렇게 해석 합니다.
…생명, 혹은 살아있는 혼이 있는 동물은 음식으로 연명해야 한다. 나는 푸른 풀을 음식으로 주었다. 일부에게는 나뭇잎을, 또 다른 동물들에게는 씨앗을, 그리고 고기로 되었다는 표현은 없다. 아마도 지금 육식 동물이 창조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타락 전까지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잡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아담의 첫번째 죄 이전에 사망이 있었어야 한다. 2
오랜 지구를 따르면 인간의 죄 이전에도 육식 동물이 존재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오랜 지구론에 따라 지질과 화석 기록을 해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출현 전에 육식 동물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화석 기록에는 당연히 동물의 죽음은 물론, 육식 동물이 다른 동물들을 잡아 먹었던 흔적, 암 덩어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랜 지구론을 따르면 생명이 있는 땅의 모든 동물들에게 하나님께서 채식을 명하셨으며 그 명령이 지켜졌다는 창세기 1장 30절은 거짓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젊은 지구론의 시각으로는 그런 해석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각 지층의 형성과 화석의 발생이 거대한 노아의 홍수에 의해 단시간에 형성된 것이라면, 인간의 타락 이후 세상이 저주받고도 한참 후에 있었던 홍수 때에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무너져 있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에서 매일 매일 반복해서 말씀하셨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연대기에서 온유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동물, 그리고 식물이 죽는 모습을 보시기에 좋아 하셨을지 반문합니다.
사과를 깎으면서 사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한가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나무에서 사과를 따고, 당근을 썰면서 내가 잔인하다거나 끔찍하다는 느낌을 받으십니까? 방금 딴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믹서기에 갈아서 감자전을 부쳐 먹으면서 감자를 불쌍하다 여겨 본적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도살장에 가서 소가 죽는 모습을 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 지인중 한분은 어릴적 시골에 살면서 때때로 밥상에 오르는 개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가 사랑하던 개가 어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맞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렇게 죽어가던 개가 자기를 보더니 반갑다고 꼬리를 치던 모습을 보고는 그 이후로는 도저히 개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린이 나뭇잎을 먹을 때와 육식 동물이 기린을 잡아 먹을 때 같은 느낌이 듭니까? 동물과 식물은 성경에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다르게 인식됩니다. 하나님에게는 다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당신께서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다는 생명들을 아무 이유없이 쓸어 버리시는게 기쁘셨을까요?
하나님의 선악 기준이 우리와 다르기에 동물이 죽는 것이 관계 없는가?
이에 수영이와 친구들은 하나님 기준의 선함이 우리의 기준과 같지 않다며, 피조물이 하나님의 정한 목적에 응답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불려진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는데, 첫번째로 하나님은 동물들이 선하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선과 악의 도덕적 기준을 적용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보시기에 좋았다! 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포함한 세상이 보시기에 좋았던 이유는 수영이가 얘기한대로 피조물이 하나님의 정한 목적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동물들의 창조 목적 중 하나는 창세기 1장 30절에 따라 푸른 채소를 먹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창조하셨던 세상은 그리고 죄가 사라지면 나타날 사망이 없는세상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이사야 11:6>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며 흙이 뱀의 양식이 되리니 나의 거룩한 모든 산에서 그것들이 해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이사야 65:25>
만화는 안토니 후크마나 헤르만 바빙크가 타락 이전에 육식이 허용되었으며 장 칼뱅과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를 인정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에 대한 근거는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동물의 세계가 주어졌다는 것은 짐승들을 죽이고 사용할 권한을 포함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그 바로 29절과 30절에는 분명하게 인간과 동물들에게 허용 된 음식은 씨 맺는 모든 채소와 나무의 열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들에게 이스라엘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식인해도 된다는 것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18세기 이전의 주석과 이후의 주석
실제로 18세기 이후에 쓰여진 일부를 제외하면 유대인들의 주해를 포함해서 대다수의 주해들이 1:29~30을 인간과 동물들에게 식물만이 음식으로 주어졌으며 동물도 서로를 잡아 먹지 않았다고 해석 합니다. 또 육식 동물이 있었음을 주장한 주석들 역시 성경에서 해석한 바가 아니라 당시 교회 내에 열풍을 일으킨 동일 과정설에 따른 해석을 했을 뿐 입니다. 방대한 자료로 유명한 풀핏 주해는 이렇게 설명 합니다.
“델리치 주석은 죄가 들어 오기전에는 육식 동물이 없었음을 가리킨다고 한다. 하지만 선사시대에도 죽음이 존재했다는 지질학적 증거는 거부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하다.” 3
에끌은 이런 배경 지식 없이 ‘어느어느 신학자가 성경을 이렇게 해석했다더라…’ 라는 설명만 넣습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오랜 지구론자들이 가장 설명하기 힘들어하는 구절은 숨기고, 창조론자들이 하지 않는 주장들은 집어 넣음으로 유신진화론적 주장이 성경적이며 논리적인 것처럼 포장시켜진 것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않좋습니다. 인간의 관념과 과학주의로 성경을 변개시켜 놓고 그것이 정의라고 말하며, 말씀을 순수하게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태도가 너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식을 하셨으므로 창조 때의 육식은 죄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육식에 대한 구절에 대해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작가님께서 도덕과 선악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 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 시에 육식이 악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홍수 이후에 육식은 더 이상 악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사라와 결혼한것은 지금의 도덕적 기준으로 근친상간 입니다. 창조론 연대기의 작가님은 아브라함이 근친 상간을 했음으로 우리도 근친상간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시는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동물을 잡아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이나 염소,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우리의 죄로 인해 이 세상이 저주받아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나의 즐거움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아야하며,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받는 피조 세계에 대해 깨달아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 입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내가 구원받았음을 기뻐합니다. 다만 그 희생의 원인이 나의 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대신, 그 말씀을 변개하는 사탄의 거짓말을 더 신뢰했다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