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 1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언뜻 보면 창세기 2장의 이야기에는 다른 순서가 있는것 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서 비평가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경우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의 저자와 2장 4절 부터의 저자가 다른 사람이며 그로 인해 창세기의 창조 순서가 다르다고 얘기를 합니다.
성서 비평가들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
그 근거를 보겠습니다.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창세기 2:4>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이 이러하니라. 그때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며<창세기 2:5>
단지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세기 2:6>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세기 2:7>
비평가들의 주장에 대한 간단한 반론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창세기 2장에서 셋째날과 다섯째 날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비평가들의 주장은 식물과 작물이 없었는데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 입니다. 즉 다른 모든 동식물 보다 사람을 먼저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는 식물과 작물 그리고 동물의 창조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이 창조 첫째 날에 대한 설명이고, 창세기 2장 5절~6절은 물과 땅을 나누신 둘째 날과 셋째 날 처음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셋째 날 후반, 넷째 날, 다섯째 날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여섯째 날 사람을 지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1장이 거시적인 전 우주에 대한 창조를 기록한 것이라면 2장 4절 부터는 포커스를 사람에게 맞추어 창조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입니다.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창조와 이미 창조하신 것을 자라나게 하시는 것의 차이
특히 2장 7절은 사람의 창조에 대한 내용이고 2장 8절 부터는 에덴 동산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꾸미시는 지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남자를 거기 두셨으며 <창세기 2:8>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들을 그 곳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2:9>
2장 9절에 나무는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게 아니고 자라나게 하신 것 입니다. 우리가 새로 집이나 정원을 만들 때, 조경을 하듯 하나님은 그곳에 나무와 꽃들로 동산을 꾸미신 것 입니다.
그러다가 논란이 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시제가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 Wayyiqtor 기법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을 부르는 바가 그대로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이를 원어로 보면, 짐승들을 지으시다라는 의미의 봐이서(וַיִּצֶר֩)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읽었을 때, 아담이 창조가 된 이후이기에 짐승들이 아담의 창조 이후에 지어졌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 구절을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NIV를 비롯한 일부 번역들은 지으셨다라는 단어 봐이서를 Form이 아닌 과거 완료형인 had formed 즉 지으셨었다로 번역했는데, 히브리어 학자 John Sailhamer는 그가 쓴 창세기 주석서 “해설자의 성경 주석” (1990년)에서 NIV의 해석을 비판하며 waw-consecutive 혹은 wayyiqtol 이라는 히브리어 문법상 “지으셨다”는 글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H.C.Leupold는 그의 책 창세기 강해 에서 동사 “지으셨다”를 과거 완료로 즉 “지으셨었던”으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히브리어 학자인 Victor P Hamilton 역시 그의 책 창세기 :1장~17장 (1990년)을 통해 Leupold의 의견에 동의하며 창세기 2장 19절을 “지으셨다”를 “지으셨었던”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논점은 이 것 입니다. wayyiqtol 혹은 waw-consecutive 라고 불리는 문법은 사건의 순서와 글의 순서가 일치해야 하는가? 아니면 먼저 나온 동사가 나중의 사건이 혹은 나중에 나온 동사가 먼저 일어났던 사건이 될 수 있는가? 의 여부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Wayyiqtor의 예제
우리는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Wayyiqtol의 사용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wattiktob)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wattahtom)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그 편지를 보내니라(wattislah). 그녀가 편지에 써서(wattiktob) 이르기를, <열왕기상 21:8~9a>
위 구절은 열왕기 상에서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기 위해 이세벨이 계략을 꾸미는 장면인데, 제가 굵은 글씨로 강조한 동사들은 Wayyiqtol 용법이 사용된 곳 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편지를 쓴 것은 한번이지만, 9절 상반절에 편지를 쓴 표현이 다시 한번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편지를 봉인하고 보낸 이전에 있었던 편지를 쓴 사건이 글에서는 그 뒤에 사용된 사례입니다.
다른 사례를 또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어나서(wayyaqumu) 나가니(wayyeleku) 여호수아가 땅을 그리러 가는 자들에게 명하여(wayesaw) 이르되, 가서 그 땅을 두루 다니며 그것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 실로에서 너희를 위하여 주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하니라. <여호수아 18:8>
이 장면은 땅을 상속 받지 못한 7 지파를 위해 제비 뽑아 상속을 하려고 땅을 그리러 사람을 보내는 장면 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땅을 그리러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땅을 그리러 떠났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에는 그 순서가 뒤 바뀌어 있습니다. 즉 일어나서 나가는 장면이 우선 명하는 것이 나중 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순서는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례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다만 한글 번역에는 원문을 잘 표현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어서 영문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Now the LORD raised up (wayyaqem) an adversary against Solomon, Hadad the Edomite; he was a descendant of the king in Edom. For it happened (Wayehi) , when David was in Edom, and Joab the commander of the army had gone up to bury the slain (Wayyak), <열왕기상 11:14~15a>
이 장면은 우상 숭배를 한 솔로몬을 징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의 대적을 일으키시는 장면 입니다. 14절을 보시면 에돔 족속 하닷을 솔로몬의 대적으로 일으키시는 장면이 나오다가 그 이후에 다윗이 왕일 때의 이야기를 합니다. 분명히 과거의 그것도 먼 과거의 이야기를 뒷 구절에 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wayyiqtol 용법의 사용이 반드시 시간의 흐름에 맞게 기록되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짐승들의 창조가 인간의 창조보다 이전이지만 글의 흐름을 위해 더 나중에 기록 되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 랍비 Yehuda Shurpin은 분명하게 wayyitol 용법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사용되어야 하지 않으며 창세기 2장 19절 역시 하나님이 창조 하셨던 (God HAD created…)로 사용될 수 있음을 얘기합니다.
Norman Geisler와 Thomas Howe의 의견을 참고해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모순이 있다는 비평가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