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부정하는 가설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
역사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한 여러가지 가설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가설들은 모두 역사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고 부정 당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그 가설들이 마치 역사적으로 검증을 받은것처럼 돌아다니지만, 그런 가설들은 학술적인 토론에서는 거론되지도 않거니와 대다수의 비평가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가설들이 무엇인지 소개하고 그 가설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문제점들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는 가장 대표적인 6가지 가설들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1) 무슬림들의 가설: 코란에 따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힌적도 없다는 가설
2) 기절 가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다는 가설
3) 환상 가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맞지만 제자들이 극도로 슬퍼해서 예수님의 환상을 본 것이라는 가설
4) 쌍둥이 가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지만 예수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어서 그가 부활한것 처럼 꾸몄다는 가설
5) 도적 가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가설
6) 음모 가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지만 제자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음모를 꾸몄다는 가설
7) 신화 가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는 가설
첫번째: 무슬림 가설
모하마드는 23년간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꾸란이라는 경전에 자신의 계시를 정리해 놓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전은 역사적인 사실과 다른 것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무슬림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주장할까요? 사실 이들의 주장은 역사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경전에 있는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꾸란 4:157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다 라고 그들이(유대인) 주장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박히지 아니했으며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 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측을 할 뿐 그를 살해하지 아니했노라 <꾸란 4:157>
성경과 유대인들을 잘 아시다면 이 구절을 보는 순간 꾸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른다는 꾸란의 주장입니다. 아시다시피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꾸란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불렀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꾸란의 주장에 어떤 다른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꾸란이 쓰여진 시기는 7세기 이후 입니다. 즉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는 무하메드는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이 아니며 거의 600년 이후에 사람입니다. 그런 계시를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보다 신뢰해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게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기록은 성경 외에 다른 역사서에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 입니다. 그는
이 보고를 없애기 위해 네로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고 그들의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해 미움을 받는 자들이 받는 가장 극렬한 고문을 받았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왔는데, 티베리우스 시대에 우리의 행정관 중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악한 미신은 악의 근원지인 유대 뿐 아니라 전세계에 흉악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중심지로 삼는 로마에까지 와서 인기를 얻었다.
라고 성경과 일관성을 갖는 역사 기록을 남깁니다.
이외에도 많은 역사가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사실상 모든 비기독교인 역사가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두번째: 기절 가설 (Swoon Hypothesis)
두번째 가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게 아니라 기절하셨다가 살아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가설입니다.
이 가설도 역사학자들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선 당시 로마 군대의 규율은 엄격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아야 할 죄수가 죽지 않거나 도망가면 이 죄수를 관리하던 군인이 대신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확실히 죽이지 않았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역사 기록 가운데 십자가 형을 받고 살아난 사례는 단 한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가 자신의 친구 세명이 십자가 형을 받는 것을 보고 티투스에게 눈물로 간청하여 그 세명의 처형을 중지시키고 그들을 극진하게 간호를 했는데, 그럼에도 세명 중 두명은 죽었고 한명이 살아났음을 기록합니다.
게다가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어찌 겨우 살아나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은줄 알고 무덤에 장사 지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몸으로 3일째 되던 날에 무거운 돌문을 열고, 무덤을 지키던 로마의 군인들을 피해서 혹은 무찌르고 걸어서 숨어 있던 제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찾아가서는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반가워 할 수 있을만큼 상처가 아물었을까요?
당시 잔혹했던 십자가형을 아는 역사학자들을 기절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번째: 환상 가설 (Hallucination Hypothesis)
세번째 가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이 살아난 환상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가설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가설 역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번째로 환상 혹은 환각이란 것이 두뇌에 일어나는 화학 작용에 의한 오류인데, 복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환상을 보는 것은 과학적으로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지 심리학자인 Frank Larøi에 따르면 단체 환상 혹은 Mass Hallucination은 존재하지 않으며 심리 치료학자 Gary Sibcy 역시 단체 환상에 대한 문헌은 찾을 수 없었음을 얘기합니다. 즉 이론적으로도 그런 사례를 찾아봐도 여러 사람이 동일한 환상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환상 가설의 가장 근본부터 불가능 함을 알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환상 가설의 문제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본 예수님이 환상이었다면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은 왜 비어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환상에 의한 것이었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있는 시신을 꺼내서 공개하면 끝이 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공개하지 못하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3년간 함께하던 제자들이야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예수님의 환상을 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왜 예수님의 환상을 봐야 했을까요? 이 역시 환상 가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 입니다.
네번째: 쌍둥이 가설 (Twin Hypothesis)
네번째 가설은 예수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 쌍둥이 형제가 부활 한 것 처럼 제자들을 속였다는 가설 입니다.
문제는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음서는 물론 사도행전, 각 서신서 특히 야고보서에도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사도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 입니다. 특히 이 가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회심 입니다. 예수님에게 쌍둥이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형제인 야고보는 알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도 야고보는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가 있었음을 폭로하는 대신 예수님이 부활했음을 믿고 그 부활을 전하게 됩니다. 이는 쌍둥이 가설이 부활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이야기 임을 입증해 줍니다.
또 쌍둥이 가설은 예수님의 무덤이 왜 비어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역사학자들은 쌍둥이 가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섯번째: 음모 가설 (Conspiracy Hypothesis)
자신이 죽는한이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던 베드로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음모 가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음에도 어떠한 이유를 위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음모를 꾸몄다는 가설 입니다. 이 가설은 위에 소개해 드렸던 가설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제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가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도 제자들의 진정성 입니다.
누군가가 사기를 치고 음모를 꾸미는 것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번다던지, 권력을 얻는다던지, 명예를 얻는다던지 음모를 꾸며서 얻는 이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얻은 이익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숨어있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모든 제자들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핍박과 고난속에서 살다가 대부분 순교했습니다.
음모 가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왜 그런 음모를 만들어내서 사서 고생을 했는지에 대한 동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또 그들은 다른 가설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인 빈 무덤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부활에 대한 선포는 모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즉 이들의 사기에 대한 검증이 아주 쉬웠다는 것 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장사 지낸 곳인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어디에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성경은 빌라도의 군인들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음을 얘기합니다. 만약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예수님의 시신만 공개하면 되는 어리숙한 음모를 꾸밀 이유가 없었을 것 입니다. 즉 제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싶었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시간이 좀 지나서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음모를 퍼뜨려야 쉽게 성공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또 이런 어리숙한 제자들의 음모에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던 사도 바울이 동참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 대제사장에게 편지를 받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음모 가설로는 이런 팩트들을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여섯번째: 신화 가설 (Myth Hypothesis)
사도 바울은 여러번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음을 간증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자신의 평생을 목숨바쳐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합니다.
신화 가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처럼 꾸며낸 얘기라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음모 가설과 비슷하지만 음모 가설은 고의성을 갖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면, 신화 가설은 제자들에게 그런 고의성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오해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주장함을 넘어서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무신론 성서 비평가 Gerd Ludemann 역시 고린도전서 15장 5절에 기록되어 있는 나타나시고라는 의미의 헬라어 오프떼(ὤφθη) 라는 단어를 통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실제로 보이셨음을 알리고 싶어했다라고 인정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아니여도, 신화 가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신화를 만들어 놓고 그 신화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만들어 낸 신화는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부활에 대한 관념에 맞지 않는 것 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그것은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부활하는 것이지 죽자마자 3일째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아니였습니다. 이런 신화는 쉽게 만들어 내기도 힘들지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도 쉽지 않은 신화 입니다. 특히 신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사건과 신화의 생성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주장이 예수님 사후 두 달도 안된 시점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신화 가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립니다.
그밖에도 다른 가설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문제점, 빈 무덤의 문제와 사도 바울이나 사도 야고보의 회심을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통해 역사 학자들은 신화 가설 역시 인정하지 못합니다.
일곱번째: 도적 가설 (Stolen Body Hypothesis)
오늘 나누는 마지막 가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도적 가설 입니다. 그리고 이는 유일하게 성경에 기록된 가설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를 훔쳐 갔다, 하라… 이에 그들이 돈을 받고 가르쳐 준 대로 하매 이 말이 이 날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알려지니라.
<마태복음 28:12~15>
지금까지 제시된 가설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빈 무덤을 어떻게 설명해 낼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만 그대로 있었어도 부활은 가장 형편없고 유치한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수가 없었고, 그 이유를 제자들이 훔쳐갔기 때문이라고 모함합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에 의해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던 무덤에서 시신을 훔쳐갔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제자들은 복음서를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아주 초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어서 문도 잠궈놓고 숨어 있었으며, 오히려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얘기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목숨걸고 따르겠다던 예수님의 장사도 지내지 못하고 숨어 있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습니다. 처음 소개해 드렸던 바트 얼만이 꾸며낸 타당하지 않은 가설 속에서 마저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 사람들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왔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칩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세상적인 이득도 없었으며 오히려 핍박과 고난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적 가설은 다른 모든 가설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 사도 바울이나 사도 야고보의 회심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이 부활해서 자신에게 나타났음을 밝히며 글을 쓰고 있는 당시에도 살아있는 수 많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음을 자신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는 것이라. 그 뒤에 그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 번에 보이셨는데 그 중의 대다수는 지금까지 남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느니라. 그 뒤에 그분께서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맨 마지막에는 제 때를 벗어나서 태어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나니 <고린도전서 15:5~8>
즉 도적 가설은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이 왜 비어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하지만, 당시의 상황과 기록에 비추어 현실성이 떨어지고, 또 다른 팩트에 대한 설명을 여전히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역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6가지 팩트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위에 제시해드린 대표적인 7가지 가설들을 살펴보면 그중 어떤 가설도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6가지 팩트를 일관성있게 또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6가지의 팩트는 완벽하게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왜 무덤이 비어 있었는지도, 왜 겁에 질려 숨어 있던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부활을 증언하게 되었는지도, 특히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하던 사도 바울과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을 믿고 제자들과 같이 목숨걸고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하게 되었는지도 완벽하게 설명해 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6가지 팩트에 대한 원인을 물음표로 비워 놓습니다. 그들은 모든 현상을 자연적인 설명 내에서 해결하려고 하지만 보시다시피 그것이 불가능 했습니다.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인간의 죄성
저는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을 부정하는 가설들을 공부하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믿기 힘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장치들을 설정해 두셨다는 것 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두가지를 제시하자면 예수님의 빈 무덤과 적대적인 인물들 사도 바울과 야고보의 회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지 않고 쓰레기처럼 버리게 놔두셨다면, 장사지낸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팩트는 무시되었을 것이고 많은 자연적인 가설들이 설득력을 얻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이 부자의 무덤에 두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부활 시키셨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머리를 써서 파수꾼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했지만 그런 잔머리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올무가 되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더 확고하게 만드는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셨고 사도 바울이 뱃속에 있을때부터 선택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수님을 가장 극렬하게 대적하는 사람으로 인도하셨고, 그의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가 가장 크게 타올랐을때, 부활을 목격하게 하심으로 사도 바울을 회심시키셨습니다.
이런 인물들 역시 수많은 가설들이 설명할 수 없는 팩트로써 하나님은 우리가 이성적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 앞에 증거를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주를 두려워 하지 않음으로 지식을 인정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삶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럼에도 성경에 비판적인 역사학자들 역시 인정하는 것이 있는데, 부활이 실제로 있었는가 없었는가의 논쟁에 상관이 없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 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다해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그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가 요즘 흔히 생각하는 ‘복’을 받아 호위호식 하면서 잘먹고 잘살았다면 후대의 역사가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그들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 음모를 꾸몄거나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가설들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들이 두려워하긴 했지만 한건만 성공하면 대박을 칠 수 있었기 때문에 용기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을 수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지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오직 예수만을 위해 살았으며 예수님을 얻기위해 자신의 소유를 포기했습니다. 그로 인해 1세기에 커다란 부흥이 있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주 작은 성도들의 희생을 거쳐 저와 여러분에게 까지 왔습니다.
그런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살고 있나요? 우리는 예수를 위해 살지도 않으며 예수님을 얻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듯 합니다. 성공과 번영을 위해서 예수님은 얼마든지 뒷전이고 예수님은 그저 바라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세상에 영생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보다 더 영광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 것 보다 더 긴박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 <히브리서 13:12~13>